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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컴피에뉴 휴전 협정을 통해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이상하게도 독일과 연합군 간의 마지막 전투는 그보다 몇 달 후에 벌어졌습니다. 바로 1919년 2월, 발트해 연안의 한 작은 도시에서 벌어진 탱겔만 전투입니다. 오늘은 탱겔만 전투에 대해 알려드릴 예정입니다.
탱겔만 전투는 왜 벌어졌을까요?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글에서는 ① 전투가 벌어진 배경, ② 전투의 전개 과정, ③ 전투의 결과와 역사적 의미라는 3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탱겔만 전투의 배경: 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싸웠을까?
1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혼란은 계속됐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과 연합군은 휴전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쟁의 완전한 종료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독일 동부와 발트해 연안 지역은 여전히 정치적·군사적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독일군의 철수와 새로운 전선 형성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패배했지만, 동부에서는 여전히 군사력이 강했습니다.
독일이 패전 후 철수하는 과정에서 발트해 연안(현재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서 권력 공백이 발생했습니다. 이 틈을 노리고 소련(볼셰비키 군대)과 지역 독립 세력들이 영토를 차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프라이코어(Freikorps)의 등장
독일은 패전 이후 정규군을 해산해야 했고, 그 결과 퇴역 군인들로 구성된 프라이코어(민병대 조직)가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결성된 자발적인 무장 단체였습니다.
독일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전쟁을 끝냈지만, 프라이코어를 이용해 동부에서 공산주의를 저지하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프라이코어와 볼셰비키 군대는 발트해 연안에서 충돌하게 되었고, 그 결과 탱겔만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2. 전투의 전개: 독일과 소련, 그리고 발트해 연안의 격돌
프라이코어의 진격
1919년 초, 독일 프라이코어 부대는 발트해 연안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북상했습니다.
이들은 공식적인 독일군이 아니라 퇴역 군인들의 자발적인 부대였지만, 상당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전투에 참여한 주요 인물: 리더는 독일군 장교였던 파울 폰 레토프-포르베크
주요 목표: 소련군을 몰아내고 발트해 지역을 친독일 세력의 통제 아래 두는 것
이들은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지역으로 진군하며, 볼셰비키(소련군)와 충돌하게 됩니다.
탱겔만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
1919년 2월, 독일 프라이코어 부대는 탱겔만(Tukums) 지역에서 소련군과 맞닥뜨립니다.
독일 측: 프라이코어 300여 명
소련 측: 볼셰비키 군대 수백 명
전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습니다.
치열한 백병전
당시 양측 모두 중화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도심과 숲속에서 근접전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독일 프라이코어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이 풍부한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볼셰비키 군대를 상대로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습니다.
지형을 이용한 전술
탱겔만 지역은 삼림이 많았고, 독일군은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여 유리한 전투를 이끌었습니다.
반면 소련군은 지휘 체계가 약해 일관된 방어를 하지 못했습니다.
소련군의 후퇴
결국 소련군은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했습니다.
독일 프라이코어는 탱겔만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3. 전투의 결과와 역사적 의미
독일의 승리, 그러나 지속된 혼란
탱겔만 전투에서 승리한 독일 프라이코어는 이후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연합국(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인해 프라이코어를 공식적으로 지원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연합국은 프라이코어가 발트해 연안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막았고, 1919년 말까지 프라이코어 부대는 해산되었습니다.
탱겔만 전투가 남긴 것
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된 전투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탱겔만 전투는 ‘1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전투’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국제 정세가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독립 과정
이 전투 이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위해 싸움을 이어갔고, 결국 1920년대 초반에 독립국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프라이코어의 영향
프라이코어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독일 내부에서는 극우 민병대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나치당(히틀러) 역시 프라이코어 출신 인물들이 핵심 멤버로 활동하면서, 2차 세계대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4. 결론
탱겔만 전투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벌어진 전투 중 하나로, 독일과 소련이 발트해 연안 지역을 놓고 충돌한 사건입니다.
이 전투는 발트해 국가들의 독립 과정, 독일의 패전 후 상황, 그리고 이후 유럽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이 전투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